호흡은 질서를 기억한다
제4부: 네 것이 아니다
관측소의 벽은 유리가 아니었다. 유리보다 투명하고, 물보다 유동적이며, 공기보다 잘 스며드는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칼릭스는 그 벽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서는 위와 아래, 안과 밖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관찰하는 층과 관찰되는 층이 있을 뿐이었고, 그 사이에는 측정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했다. 거리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 속했다. 칼릭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현실의 층이 겹쳐져 보였다. 루안의 연구소, 세린의 플렉시움, 그리고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수많은 평행 공간들. 각각의 공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서로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니터는 없었다. 대신 공간 자체가 정보를 표시했다. 칼릭스가 손을 뻗으면 허공에 데이터가 떠올랐다. 숫자와 그래프, 파형과 궤적들이 반투명한 막 위에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것은 동기화율이었다. 87.3%. 루안과 세린의 패턴이 겹치는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였다. 위험 수준은 90%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 이상이 되면 시스템이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칼릭스는 그 변화를 여러 번 목격했다. 때로는 완전한 융합으로, 때로는 완전한 소멸로,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제3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번 순환은 어떤 결말을 맞을까. 칼릭스의 표정에는 감정이 없었다. 감정은 관찰을 흐리게 만드는 불순물이었다.
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단조로웠고, 억양의 변화도 없었다. 순환 47, 일차 변칙 감지. 피험자 B, 발끝 각의 크기 1도 이탈. 관찰자 루안, 무의식적 동조 현상 가속화. 예상 수렴 시점, 72시간 이내. 권장 조치, 개입 불필요. 시스템 자가 조정 가능 범위 내. 그러나 칼릭스는 알고 있었다. 자가 조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한 균형인지를. 시스템은 스스로를 유지하려 하지만, 그 노력이 오히려 붕괴를 앞당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끈기와 인내라는 성향은 더욱 그랬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른 실험체들의 상태도 확인했다. 창의 실험체는 이미 세 번째 붕괴를 경험했다. 너무 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상상하다가 자아가 분열되는 패턴이었다. 공감 실험체는 반대였다. 너무 많은 감정을 흡수하다가 자신을 잃어버렸다. 혼돈 실험체는 예측 자체가 불가능했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른 시점에,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 끈기 실험체가 가장 안정적이었다. 47번의 순환 동안 한 번도 완전한 붕괴를 경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정성은 영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유지될수록 붕괴의 충격은 더 컸다.
칼릭스가 벽에 손을 댔다. 벽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장면을 보여주었다. 루안이 기억 거래 시장을 방문하는 모습이었다. 예정에 없던 일탈이었다. 그곳에서 프로토타입을 만났다. 실패작 A-3. 수 년 전 폐기 처분된 실험체였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만남이 루안에게 미칠 영향이었다. 자각은 가속화의 촉매제였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 변화는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된다. 칼릭스는 개입을 고려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이번 순환은 네 것이 아니다. 그 말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공간의 온도가 미세하게 변했다. 0.3도 상승. 루안과 세린의 동기화율이 88%를 넘어섰다는 신호였다. 온도 변화는 시스템의 부하를 나타냈다. 두 개의 의식이 하나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열로 변환되는 것이었다. 칼릭스는 온도계를 보지 않고도 그것을 알았다. 피부로 느꼈다. 피부라는 표현이 맞는지 의문이다. 관측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신체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다. 때로는 벽과 구분되지 않았고, 때로는 관찰 대상과 구분되지 않았다. 그것이 관찰자의 운명이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에서 서서히 투명해지는 것.
세린이 트윈릭에서 떨어졌다. 착지 실패. 왼쪽 발목을 잡고 쓰러졌다. 같은 시각, 루안도 의자에서 비틀거렸다. 왼쪽 발목에 통증을 느꼈다. 물리적 손상이 없는데도 통증만 전이되는 현상. 이것은 동기화의 마지막 단계였다. 육체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곧 생각의 경계도, 기억의 경계도 무너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루안과 세린은 더 이상 두 개의 개체가 아니게 된다. 하나가 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거나. 칼릭스는 그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개입하지 않고,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그저 기록할 뿐.
다른 구역에서 변칙이 감지되었다. 혼돈 실험체가 또 다른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꿈을 통해서였다. 꿈속에서 다른 실험체의 의식에 침투하려는 시도였다. 성공하면 연쇄 붕괴가 일어날 수 있었다. 칼릭스는 차단 프로토콜을 실행했다. 혼돈 실험체의 렘수면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깨어난 실험체는 분노했지만, 분노도 곧 시스템에 의해 진정되었다. 모든 것은 통제 하에 있었다. 통제라는 환상.
루안이 다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세린의 수면 패턴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관찰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거울의 거울의 거울. 무한히 반복되는 반사 속에서 원본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칼릭스는 그 무한 회귀의 끝을 알고 있었다. 끝은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구분되지 않게 될 뿐이었다. 그것이 실험의 목적인지, 부작용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계자조차 모를 것이다. 설계자도 실험의 일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렀다. 관측소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했다. 칼릭스는 루안과 세린의 과거를 볼 수 있었고, 현재를 보고 있었으며, 미래도 어렴풋이 보였다. 미래는 확정되지 않았다. 여러 가능성이 구름처럼 떠다녔다. 가장 선명한 것은 붕괴였다. 72시간 후, 동기화율 100%, 시스템 재부팅.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희미하지만 존재했다. 1도의 일탈이 만들어낸 균열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그것은 붕괴가 아니라 진화일 수도 있었다.
칼릭스가 다시 로그를 읽었다. 보충 관찰. 피험자 B, 이름 ‘세린’ 자각 임박. 관찰자 루안, 설계자 정체성 회복 징후. 상호 인식 시점 예측, 48시간 이내. 시스템 권고, 격리 또는 종료. 그러나 칼릭스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순환은 특별했다. 47번의 반복이 만들어낸 관성이 있었다. 그 관성이 어디로 향할지 지켜볼 가치가 있었다. 과학적 호기심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칼릭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관찰자도 결국 인간이었고,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벽이 다시 일렁였다. 이번에는 다른 장면이었다. 황야였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그곳에 누군가 걷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걸이는 익숙했다. 루안의 균형, 세린의 리듬. 둘이 합쳐진 무언가. 미래의 한 가능성이었다. 칼릭스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칼릭스 자신도.
이번 순환은 네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속삭였다. 그렇다면 누구의 것인가.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안과 세린이 결정할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존재 자체가 답이 될 것이다. 칼릭스는 지켜볼 것이다. 끝까지, 끝을 넘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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