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은 질서를 기억한다
제3부: 상품이 된 끈기
연구소를 나선 것은 충동이 아니었다. 충동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오래 계획했고, 계획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모호했다. 출입 카드를 찍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보안 시스템은 내 외출을 기록했겠지만, 누구도 묻지 않을 것이다. 관찰자의 일탈은 시스템의 관심사가 아니다. 시스템은 오직 피험자의 데이터에만 관심이 있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연구소의 무균실과 달리 습했고, 곰팡이와 녹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유기적인 부패와 무기적인 산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공간. 그것이 도시의 지하였다. 세 번째 환승역에서 내려 표시되지 않은 통로로 들어갔다. 좁고, 천장이 낮았다. 숙인 자세로 걷는 동안, 호흡이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그 소리가 피험자 B의 호흡과 비슷했다.
기억 거래 시장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가장 확실하게 존재한다. 폐쇄된 지하 쇼핑몰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형광등의 절반은 꺼져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깜빡거렸다. 불규칙한 명멸이 만들어내는 리듬이 있었다.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현기증이 났지만, 그것도 시장의 일부였다.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 더 쉽게 거래에 응한다는 것을 상인들은 알고 있었다. 첫 번째 가판대에는 ‘용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작은 앰플에 담긴 붉은 액체. 물론 액체는 장식일 뿐이고, 실제 상품은 앰플에 부착된 칩에 들어있는 알고리즘이었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뇌파 패턴을 분석해 만든 인공 자극 시퀀스. 주사하는 것이 아니라 뇌에 직접 업로드하는 방식이었다. 가격표를 보았다. 15분에 삼만 원. 용기도 시간 단위로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두 번째 가판대는 ‘공감’을 팔았다. 상인은 내게 시연을 권했다. 거절했지만 그는 이미 스캐너를 내 이마에 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낯선 감정이 밀려왔다. 길고양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누군가의 감정, 뉴스를 보며 분노하는 누군가의 감정, 연인과 헤어지며 무너지는 누군가의 감정.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내 안에서 공명했다. 스캐너를 떼자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텅 빈 느낌이었다. 상인이 웃었다. 비어있는 게 불편하면 구매하시면 됩니다. 영구 이식도 가능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공감은 이미 피험자 B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공감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세 번째 가판대를 지나칠 때, 낯익은 파형을 보았다. ‘끈기’였다. 정확히는 ‘지속적 과제 수행을 위한 신경 강화 알고리즘’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피험자 B의 패턴과 같았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단순화되어 있었고, 인위적으로 증폭되어 있었다. 원본을 복사하고 편집한 것이 분명했다. 상인에게 물었다. 이건 어디서 났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상품을 보여주었다. ‘절제’, ‘균형’, ‘반복 내성’. 모두 피험자 B에게서 본 특성들이었다. 그것들이 이렇게 쪼개지고, 포장되고, 가격표가 붙여져 있었다. 한 인간의 본질이 상품 진열대에 나열된 광경이 그로테스크하고, 자연스러웠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된다. 감정, 기억, 성향까지.
저온 쇼케이스 앞에 멈춰 섰다. 투명한 벽 너머로 수백 개의 기억 칩이 떠있었다. 각각의 칩은 미세하게 진동하며 청백색 빛을 냈다. 빛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있었다. 무작위한 것 같으면서도 어떤 질서를 따르는 듯한 움직임. 쇼케이스 옆 모니터에는 칩의 정보가 표시되었다. ‘첫사랑의 설렘 - 23세 여성’, ‘합격의 기쁨 - 19세 남성’, ‘상실의 슬픔 - 45세 여성’.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트윈릭 물구나무서기 근육 기억 - 전문 플렉서’, ‘바이올린 운지법 - 15년 경력’. 기술과 지식도 거래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트윈릭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었다.
시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조명은 더 어두워졌고, 상인들의 표정도 더 경계하는 듯했다. 여기서부터는 불법 중에서도 불법인 것들이 거래되는 구역이었다. 완전한 인격 전이, 의식 융합, 다중 자아 생성. 모두 국제법으로 금지된 것이었지만, 수요가 있는 곳에는 공급이 따르는 법이었다. 한 노인이 젊은이의 생애 기억을 사려 하고 있었다.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칠천만 원. 24년의 삶이 칠천만 원. 1년에 약 삼백만 원. 1일에 약 팔천 원. 시간당 삼백삼십 원. 그것이 한 인간의 존재 가치였다.
단속팀이 나타났다. 재빠르게 물건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도 출구를 찾아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도망치는데, 나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고 있었다. 누군가 내 팔을 잡고 있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후드를 깊이 쓰고 있어 그림자만 보였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익숙했다. 정확하고, 균형 잡혀 있고, 불필요한 움직임이 없는 걸음. 그 사람이 나를 숨겨진 통로로 이끌었다. 통로는 더 깊은 곳으로 이어졌다.
막다른 곳에 작은 방이 있었다. 방 안에 있는 건 모니터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그 사람이 후드를 벗었다.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지 않았다.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녀가, 그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루안입니까.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 목소리였다. 피험자 B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더 거칠고, 지쳐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웃었다. 웃는 것 같았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확실하지 않았다. 저는 실패작입니다.
모니터를 켰다. 화면에는 낯익은 그래프가 나타났다. 피험자 B의 데이터였다. 조금 달랐다. 더 날것이고, 더 불안정했다. 이건 제 데이터예요. 5년 전의. 그 사람이 설명했다. 저도 같은 실험의 일부였어요. 끈기와 인내의 극한을 테스트하는 프로젝트. 하지만 저는 깨졌죠. 1도가 아니라 10도, 20도, 결국 90도까지 벗어났어요.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폐기되었고, 새로운 피험자가 투입되었죠. 그게 지금 당신이 관찰하는 B예요. 더 안정적이고, 더 예측 가능한 버전.
왜 저를 찾아왔습니까. 그 사람이 잠시 침묵했다. 침묵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소리였지만, 가끔 불규칙하게 변했다. 심장 박동처럼. 당신도 느끼고 있잖아요. 동기화를. 그것은 설계된 것이에요. 관찰자와 피험자가 서로에게 끌리도록,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그래야 실험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니까. 하지만 그 끌림이 너무 강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경계가 무너지면. 그 사람이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그러나 맥박은 뜨거웠다. 저처럼 되는 거예요. 시스템 밖으로 튕겨 나가는 거죠.
손을 뿌리쳤다. 그 사람은 놓아주었다. 쉽게 놓아주는 것이 오히려 불안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뭡니까. 그 사람이 다시 모니터를 가리켰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내 데이터였다. 연구소 시스템에서만 볼 수 있는 기밀 데이터가 어떻게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보세요. 당신의 패턴도 변하고 있어요. 피험자 B와 같은 방향으로. 아니, 더 정확히는 서로를 향해 수렴하고 있죠. 조만간 완전히 겹칠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 사람이 말을 멈췄다. 그때가 되면. 새로운 무언가가 태어나거나, 둘 다 소멸하거나. 극단적인 결과만 가능해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었다. 매일 조금씩 피험자 B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단순한 공감을 넘어선 무언가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일어섰다. 가봐야 해요. 단속이 곧 여기까지 올 거예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1도의 일탈이 시작이에요. 그 작은 틈으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어요. 또는 새로워질 수 있고.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당신과 B가 함께 하는 거죠.
통로로 다시 나왔을 때, 그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손의 감촉은 남아있었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모순적인 온도. 연구소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계속 손을 들여다보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다른 것 같았다. 피험자 B도 지금 이런 느낌일까.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는 불안. 혹은 기대.
연구소 입구에 도착했을 때, 새벽 4시였다. 피험자 B가 깨어나기 1시간 47분 전. 모니터 앞에 앉았다. 화면에는 평온한 수면 패턴이 표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꿈일까. 혹시 지하 시장의 꿈? 버려진 프로토타입의 꿈? 아니면 1도의 일탈이 90도가 되는 꿈? 나도 모르게 화면에 손을 댔다. 딱딱한 유리였지만, 그 너머에 온기가 있는 것 같았다. 피험자 B의 온기. 세린의 온기.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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