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어는 동부 유럽에서 유일하게 로망스어(Romance languages) 계열에 속하는 언어로, 지리적·역사적 이유로 주변의 슬라브어·투르크어·헝가리어 등 다양한 언어적 요소와 접촉해 왔다. 이 글에서는 루마니아어가 어떻게 라틴어의 유산을 계승하며, 동부 발칸 지역이라는 독특한 환경 속에서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는지 살펴본다. 먼저, 루마니아어의 기원과 계통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 루마니아어의 기원과 계통
루마니아어(limba română)는 로망스어(Romance languages) 계열에 속하며, 기원적으로는 고대 로마가 정복한 다키아(Dacia) 지역의 라틴어가 근간이 되었다. 대략 2세기 초반 트라야누스(로마 황제)가 다키아를 점령한 뒤, 로마 병사와 식민이 유입되며 현지 원주민(다키아인) 언어와 혼합된 ‘발칸화된 라틴어’가 루마니아어의 뿌리를 이루게 된다.
한편, 로마 제국이 수세기에 걸쳐 해체되는 과정에서, 루마니아 지역(오늘날의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등)은 외부 침입(고트족, 슬라브족, 아바르족 등)을 거치며 주변 민족의 언어와 접촉했다. 특히 중세 이후 발칸반도 전역에 슬라브어가 강하게 퍼져 루마니아어 어휘·발음에도 슬라브 영향을 부분적으로 끼쳤다.
그럼에도 루마니아어는 이탈리아어·프랑스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 등과 뚜렷한 친연성을 지니며, “동부 로망스어(Eastern Romance)”라는 독립된 분파로 분류된다. 로망스어 내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주변 언어들(슬라브, 투르크, 헝가리)과도 교류해 독특한 어휘·문법적 특색을 갖게 되었다.
역사 문헌에 따르면, 4세기 이후로 로마 행정력이 약화되면서, 다키아 지방의 로망스어 화자들이 산악 지대 등으로 이동하거나, 남부 발칸으로 이주하여 아로마니아어(Aromanian) 등 방언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루마니아어”가 자의식을 가진 공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중세 이후의 국가·교회·문학 발전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루마니아어는 고대 라틴어를 뿌리로 하되, 발칸반도 민족 대이동과 주변 언어 영향으로 독특한 진화를 거쳤으며, 근대에 들어와 스스로를 “로망스어권의 동쪽 파수꾼”으로 인식하며 자국어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원과 계통 덕분에, 루마니아어는 유럽 언어 중에서도 ‘유럽 서부 라틴어권’과 ‘동부 발칸 세계’의 교차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언어라 할 수 있다.
2. 로망스어 중 동부 지역 언어로서의 특징
루마니아어가 로망스어 계통에 속한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지만, 유럽 대륙에서 다른 로망스어(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와 상당히 떨어진 동부 발칸 지역에서 발전해 왔다는 점이 특별하다. 이 절에서는 서유럽 로망스어와 차별화되는 루마니아어만의 언어적 특징과, 주변 민족·언어들의 영향이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알아보겠다.
일반적으로 로망스어라고 하면, 지중해 서부와 남서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을 떠올리기 쉽다. 반면, 루마니아어는 “동부 로망스어(Eastern Romance)”라 불리며,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발칸반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어는 전형적인 라틴어 계통 문법 요소와, 발칸 지역 특유의 발칸 언어 연합(Balkan Sprachbund) 현상 모두를 보여준다.
발칸 Sprachbund는, 여러 언어가 서로 친족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의 접촉을 통해 문법·어휘·음운 체계에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어 역시 주변의 슬라브어, 그리스어, 알바니아어, 투르크어 등과 교차 영향을 주고받아, 후치 정관사, 부정사 대신 접속법 사용 같은 독특한 점을 공유하기도 한다.
또한 서유럽 로망스어와 달리, 키릴 문자를 일시적으로 사용한 시기가 있었고(중세~19세기 초반), 어휘 측면에서도 슬라브 기원의 단어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da(“yes”)는 슬라브 언어(러시아어 등)와 같은 형태이고, a încălzi(“to warm”) 등 일부 동사 어근에서 발칸 어휘가 느껴진다.
루마니아어는 라틴어 기본 틀과 발칸 지역 성격을 결합한, 로망스어족 내에서도 가장 ‘동쪽 변방’에 위치한 언어로 볼 수 있다. 이는 로망스 언어 특유의 성·수·격, 어휘를 보존하면서도, 후치 정관사나 특정 어순 현상 등, 발칸 언어권적 요소를 함께 지니는 데서 나타난다. 이런 이중적 성격이 바로 루마니아어를 “유럽 언어 지형에서의 가교”로 만드는 중요한 배경이다.
3. 루마니아·몰도바 내 언어 지위
현대 루마니아어는 루마니아 공화국의 유일한 공용어로서, 국가 행정과 교육, 미디어, 사법 등 모든 공식 영역에서 사용된다. 또한 몰도바 공화국에서도, 실제로는 루마니아어와 사실상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지만, 헌법이나 정치적 선언에서 “몰도바어(Moldovenească)”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다. 이 명칭 문제는 루마니아와 몰도바 양국 간의 역사·정치적 민감성을 반영한다.
몰도바 지역(옛 베사라비아)은 과거 러시아 제국과 소련 지배를 거치면서, 정치적 분리 상황이 이어졌고, 소련 시기에는 키릴 문자로 “몰도바어”가 표기되기도 했다. 1989년 이후 루마니아어(몰도바어) 공식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명칭에 관한 논쟁은 남아 있으며, 헌법 표기와 공문서에서 여전히 “몰도바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경우가 있다. 반면 실제 언어학계에서는 “몰도바어 = 루마니아어”라는 견해가 주류다.
한편 몰도바 안에서도, 젊은 층이나 해외 이주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루마니아 알파벳(라틴 문자)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 키릴 문자를 쓰던 시기는 사라져 가며, 일상 생활이나 인터넷, 교과 과정에서 루마니아어 철자 규범이 정착해 가는 추세다.
루마니아에서는 약 2천만 명의 인구가 루마니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몰도바도 약 3백만 명 이상(트랜스니스트리아 등 분쟁 지역 제외)이 사실상 루마니아어(몰도바어)를 구사한다. 추가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의 디아스포라에서도 루마니아어 사용자 공동체가 존재한다.
루마니아어는 루마니아와 몰도바 모두에서 중심적 공용어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명칭·표기 방식에 대해 역사적·정치적 논란이 존재하지만, 실제 언어적 실체는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오늘날엔 몰도바에서도 루마니아어 정규 교육과 미디어가 활발해지는 추세로, 상호 교류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