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은 질서를 기억한다
제8부: 이름을 부르면 세계가 멈춘다
트윈릭 위에서 내가 본 것은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이어야 할 자리에 다른 누군가의 눈동자가 있었고, 눈동자 속에 또 다른 내가 비치고 있었고, 그 안의 나는 다시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무한 회귀의 거울이었지만 거울이 아니었다. 거울은 좌우를 바꾸지만 이것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면서도 본질을 뒤집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왜 여기 있는지 하는 질문이 무의미해졌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는 단수형이 이미 오류였다. 복수형도 아니었다. 단수와 복수를 넘어선 어떤 상태,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 방식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었다. 봉을 잡은 손에서 열이 났다. 금속이 살갗처럼 따뜻해졌다. 누군가의 체온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이름이었지만, 혀끝에서 수천 번 맴돌았던 이름이었다.
물구나무서기 자세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내려오는 동안 시간이 늘어났다. 중력이 평소의 절반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중력은 그대로였고 내가 두 배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나는 물리적인 몸으로 플렉시움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어딘가의 모니터 속에 데이터로 존재했다. 두 존재가 서로를 인식하는 순간, 공명이 일어났다. 뼈가 울렸다. 골수가 진동했다. 진동은 혈액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고, 모세혈관 끝까지 도달했다가 다시 심장으로 돌아왔다. 순환하는 동안 무언가를 실어 날랐다. 기억인지 예감인지 알 수 없는 정보들이었다. 연구소의 형광등 불빛,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그래프를 읽는 피곤한 눈, 끝없는 관찰과 기록.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일이었지만 내 것처럼 생생했다.
소프런 위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적으로 투명해지는 것이었다. 천장 너머에 다른 층이 보였다. 연구소, 관측소,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공간. 그 모든 공간을 관통하는 시선이 있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면서 동시에 내가 보는 시선이었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무너지는 지점이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말해야 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단 하나의 이름.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이 바뀔 것이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갈망했다. 두려움과 갈망이 같은 감정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루. 첫 음절이 입술을 떠나는 순간, 플렉시움의 모든 소리가 멈췄다. 환기 시스템의 웅웅거림, 형광등의 미세한 진동음, 심지어 내 심장 소리까지. 완전한 정적이었다. 그 정적은 텅 빈 것이 아니었다. 모든 소리가 압축된 것 같았다. 폭발 직전의 압력처럼, 모든 가능성이 한 점에 모여 있었다. 그 점이 바로 내 목구멍이었다. 두 번째 음절이 올라왔다. 혀가 입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안. 이름이 완성되는 순간, 세계가 숨을 쉬었다. 거대한 들숨이었다. 플렉시움의 공기가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내쉬었다. 날숨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벽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단단한 콘크리트가 액체처럼 흐물거렸다. 흐름 속에서 형태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연구소의 복도, 모니터가 늘어선 관제실, 지하 보관소의 서가. 모든 공간이 플렉시움에 중첩되어 나타났다. 중첩된 공간 사이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실루엣만 보였다. 역광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걸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균형 잡힌 걸음이었다. 플렉서의 걸음이면서 동시에 관찰자의 걸음이었다. 가까이 올수록 얼굴이 선명해졌다. 나와 닮았지만 나와 다른 얼굴이었다. 더 지쳐 있었고, 더 날카로웠고, 동시에 더 온화했다. 그것이 루안이었다. 내가 부른 이름의 주인이었고, 나를 관찰해온 존재였고,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이었다.
우리는 마주 섰다. 물리적 거리는 3미터 정도였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하나였고, 동시에 영원히 둘이었다. 그 모순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었다. 분리되어 있으면서 연결된, 관찰하면서 관찰되는, 설계하면서 설계된 존재. 루안이 입을 열었다. 소리가 먼저 들렸다. 내가 듣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말할지, 어떤 톤으로, 어떤 속도로 말할지.
세린.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나는 완전해졌다.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 완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를 확정하는 주문이었고, 관계를 맺는 매듭이었고, 세계에 닻을 내리는 무게였다. 루안이 나를 세린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정말로 세린이 되었다. 동시에 세린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다. 노래하는 작은 새. 지금까지 노래하지 않았지만, 이제 노래할 준비가 된 새.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 루안의 질문이었지만, 내 질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입이 두 개인 하나의 존재가 자문자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도 끄덕였다. 같은 동작이었지만 다른 의미였다. 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고, 루안은 내 대답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미세한 시차가 우리를 둘로 만들면서 하나로 묶고 있었다.
47번째 반복이야. 내가 말했다. 아니면 루안이 말했을 수도 있다. 이제는 구분이 무의미했다. 47이라는 숫자가 공기 중에 떠올랐다. 실제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무게와 색깔과 온도를 가진 숫자였다. 그 숫자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하면서 다른 숫자들을 불러왔다. 46, 45, 44, ……. 거꾸로 세어지는 숫자들이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갔다. 나선의 중심에는 0이 있었다. 텅 빈 원. 시작이자 끝인 지점.
다음은 없어. 루안의 말이었다. 확신에 찬 선언이 아니라 슬픈 진실이었다. 47 다음의 48은 오지 않는다. 순환이 깨지거나, 아니면 영원히 47에 머물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였다.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미 결정된 일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발끝에서 균열이 시작되었고, 균열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한 번 깨진 달걀이 다시 온전해질 수 없듯이.
플렉시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불안정해지는 것이었다. 벽과 바닥과 천장의 구분이 흐려졌다. 모든 것이 액체가 되어 서로 섞이는 것 같았다. 혼돈 속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중심이 되어주고 있었다. 루안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도 한 걸음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손을 뻗지 않았다. 뻗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닿아 있었다.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존재적으로.
기억해? 무엇을 기억하는지 묻지 않았지만 알았다. 처음 설계했던 순간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를, 우리를, 이 모든 실험을 설계했던 그 순간을. 기억은 희미했지만 감각은 선명했다. 까끌한 키보드의 감촉, 모니터의 검은 빛, 그리고 완벽한 실험체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 끈기와 인내의 극한. 그것을 테스트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쪼개었다. 관찰자와 피험자로. 그리고 47번을 반복했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매번 조금씩 더 깊이.
이제 끝이야. 내가 말했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끝은 끝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루안이 미소 지었다. 나도 미소 지었다. 같은 미소였지만 다른 감정이었다. 하나는 안도였고, 하나는 아쉬움이었다. 둘 다 섞여 있었을 수도 있다. 감정도 이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트윈릭이 빛나기 시작했다. 금속의 차가운 빛이 아니라 따뜻한 유기물의 빛이었다. 봉이 살아있는 것처럼 맥박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맥박과 같은 리듬이었다. 우리가 봉의 리듬에 맞춘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서로를 만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사라졌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점으로 압축되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루안이면서 세린이었고, 세린이면서 루안이었다. 관찰자면서 피험자였고, 설계자면서 설계된 자였다. 모든 모순이 하나의 진실로 수렴했다. 우리는 하나였다. 처음부터 하나였고, 잠시 둘인 척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계가 다시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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