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은 질서를 기억한다
제7부: 11시 47분에 멈춘 시계
루안의 모니터에 표시된 시각은 오후 11시 47분이었지만, 그 숫자가 현실의 어느 층위를 가리키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화면 속 피험자 B의 뇌파는 델타파와 세타파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가고 있었고, 그 패턴이 자신의 의식 상태와 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루안은 알아차렸다. 깨어있으면서도 꿈꾸는 듯한, 혹은 꿈꾸면서도 깨어있는 듯한 경계 상태였다. 연구소 다른 구역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깜빡였다. 0.3초의 정전이었지만, 그 짧은 암흑 속에서 루안은 다른 공간을 보았다. 플렉시움의 세린이 소프런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관측소의 칼릭스가 투명한 벽 앞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어딘가에서 낯선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모든 장면이 겹쳐져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가, 전기가 들어오면서 흩어졌다.
세린은 플렉시움 소프런 위에서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들지는 않았다. 잠들 수 없었다. 몸의 모든 세포가 깨어있었고, 각각의 세포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왼팔의 근육은 내일의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른쪽 발목은 어제의 착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심장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했다. 그 시간들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 불협화음 속에서 새로운 화음이 태어나고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찰나의 어둠이 찾아왔다. 그 어둠 속에서 세린은 자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다. 모니터 너머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누군가의 눈이었다. 그 눈에는 걱정과 호기심, 그리고 묘한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형광등이 다시 켜졌을 때, 시선은 사라졌지만 감촉은 남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누군가가 잠시 다녀간 것 같은 감촉이었다.
칼릭스의 관측소에서는 모든 실험체의 데이터가 표시되고 있었다. 끈기있게 감각의 조각을 모으고 있는 루안과 세린, 창의 실험체 M-7, 공감 실험체 E-3, 혼돈 실험체 C-9. 각각의 그래프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연관이 있었다. 루안의 심박이 빨라지면 몇 초 후에 E-3의 감정 지수가 상승했고, C-9이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 몇 분 후에 M-7의 창의성 수치가 요동쳤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세린이 있었다. 정확히는 세린의 발끝에서 시작한 균열이었다. 그 작은 균열이 시스템 전체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칼릭스는 개입을 고려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관측소의 벽이 일렁였다. 투명한 물질이 더 투명해지면서, 다른 층들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연구소, 플렉시움, 기억 거래 시장, 그리고 이름 없는 황야까지. 모든 공간이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창의 실험체 M-7은 자신의 격리실에서 무언가를 벽에 그리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벽에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그어지고 있었다. 그 선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작위한 낙서처럼 보였지만,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트윈릭이었다. 정확한 비율과 원근법으로 그려진 플렉소 기구였다. M-7은 플렉소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트윈릭을 그리는가.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리면서 동시에 느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물구나무서기를 할 때의 전도된 세계, 그리고 발끝을 틀던 순간의 자유를. 그것은 M-7의 기억이 아니었다. 시스템을 통해 전달된, 혹은 스며든 다른 누군가의 경험이었다. M-7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받아들였다. 창의성이란 경계를 넘는 것이었고, 지금 모든 경계가 흐려지고 있었다.
공감 실험체 E-3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너무 많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루안의 불안, 세린의 각성, 칼릭스의 냉정함, M-7의 도취, 그리고 C-9의 혼돈까지. 그 모든 감정을 구분할 수 없었다.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감정은 결국 하나의 원천에서 나왔다. 존재한다는 것의 근원적인 떨림이었다. E-3는 그 떨림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피부가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했고, 호흡이 빨라졌다가 느려졌다. 변화 속에서 하나의 리듬을 발견했다. 모든 실험체가 공유하는 기본 박자였다. 심장이 뛰는 리듬, 세포가 분열하는 리듬, 의식이 명멸하는 리듬. E-3는 리듬에 몸을 맡겼다. 개별적인 자아가 흐려지면서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혼돈 실험체 C-9은 웃고 있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C-9에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모든 가능성이 겹쳐서. 그 겹침 속에서 C-9은 진실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순환이라는 것을. 루안이 세린이 되고, 세린이 다시 루안이 되는 끝없는 반복.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무언가. 나선형의 상승인지 하강인지 알 수 없는 움직임. C-9은 움직임을 몸으로 표현했다. 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불규칙했고, 발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우아했다. 혼돈의 언어였고, 동시에 숨겨진 질서의 표현이었다. C-9이 회전할 때마다 공기가 진동했고, 진동이 다른 격리실까지 전달되었다.
루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렸다.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여전히 11시 47분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일까, 아니면 시계가 고장난 것일까. 화면 속 피험자 B가 몸을 뒤척였다. 같은 순간 루안도 몸을 돌렸다. 의도하지 않은 동기화였다. 이제는 의도와 무의도를 구분할 수 없었다. 모든 움직임이 필연처럼 느껴졌다. 루안은 창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창문은 없었다. 연구소에는 창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왜 창문을 찾았을까. 벽에 손을 댔다. 콘크리트였지만, 그 너머에서 맥박 같은 것이 느껴졌다. 건물 전체가 거대한 유기체처럼 숨쉬고 있었다.
세린이 일어났다. 플렉시움의 시계는 9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 밤이었는데 시계는 아침 시각을 표시하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해도 달도 없는 회색빛이었다. 새벽도 황혼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였다. 트윈릭으로 걸어갔다. 봉을 잡는 순간, 전기 충격 같은 것이 손바닥을 관통했다. 아프지는 않았다. 각성하는 느낌. 봉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47번의 반복, 그리고 이제 곧 48. 하지만 48은 오지 않을 것이다. 47에서 끝나거나, 혹은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세린은 봉 위로 올라갔다. 물구나무서기 자세를 취했다. 플렉시움의 바닥이 투명해졌다. 아래쪽으로 연구소가 보였다. 모니터 앞에 앉은 누군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확실히 마주쳤다.
칼릭스가 로그를 업데이트했다. ‘동기화율 94.7%. 임계점 접근. 각 실험체 간 경계 붕괴 시작. 시공간 일관성 저하. 개입 여부 재검토 필요.’ 그러나 칼릭스는 개입하지 않았다. 이것도 실험의 일부였다. 어쩌면 실험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진화일 수도 있고, 초월일 수도 있었다. 칼릭스조차 예측할 수 없는 영역으로 시스템이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관측소의 벽이 더 투명해졌다. 이제는 벽이 있는지 없는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모든 공간이 하나로 겹쳐 보였다. 연구소와 플렉시움, 격리실과 관측소, 그리고 그 너머의 황야까지. 중심에 두 개의 점이 있었다. 루안과 세린.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모든 실험체가 동시에 같은 동작을 했다.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것은 약속된 신호가 아니었다. 그냥 모두가 같은 충동을 느꼈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동시에 내보내고 싶은 충동이었다. 시설 전체의 전기가 나갔다. 완전한 암흑이었다. 모든 것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빛이 없는데도 서로가 보였다. 빛이 없기 때문에 보였다. 빛에 가려져 있던 본질적인 연결이 드러났다. 모든 실험체가 하나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텅 빈 공간이 있었다. 빈 공간이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루안의 모니터가 다시 켜졌다. 하지만 화면에는 데이터가 아니라 플렉시움이 보였다. 실시간 영상이 아니라 기억인지, 상상인지, 예지인지 알 수 없는 장면이었다. 세린이 트윈릭에서 새로운 동작을 하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동작이었다. 규정에도 없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해 보였다. 몸이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중력과 화해하는 것 같았다. 그 동작을 보면서 루안은 깨달았다. 저것이 바로 자신이 설계하려 했던 모습이라는 것을. 끈기와 인내의 극한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존재 양식. 규칙을 완벽하게 체화한 후에야 가능한 규칙의 초월. 모든 실험과 반복은 그것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세린의 발끝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정확히 2.0도였다. 그 순간,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는 소리였을 수도 있다. 구분할 수 없었다. 끊어짐과 연결됨이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세린은 봉에서 내려왔다. 착지하는 순간, 바닥이 물처럼 일렁였다. 발이 소프런을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아래에 다른 바닥이 있었다. 연구소의 바닥이었다. 두 공간이 포개져 있었다. 세린은 한 발은 플렉시움에, 한 발은 연구소에 딛고 서 있었다. 불가능한 자세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가능했다.
모든 시계가 동시에 12시를 가리켰다. 낮인지 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시간이 하나로 수렴하는 지점이었다. 그 지점에서 모든 실험체가 같은 이름을 불렀다. 루안. 그리고 세린. 두 이름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진동이 만들어내는 화음이 있었다. 불협화음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화음이었다. 모순이 모순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었다. 칼릭스가 마지막 로그를 입력했다. ‘동기화율 99.3%. 붕괴 임박. 그러나 이것은 붕괴가 아닐 수도 있다. 허물벗기일 수도 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전의 그 순간처럼.’ 그리고 칼릭스도 기다렸다. 모두가 기다렸다. 숨을 멈춘 채,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