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바람의 속삭임

by Ariel Daley

시간이 무겁게 흐르는 날이었다. 강의가 끝난 오후,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수학사 교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과제를 내주셨다. 반 세기 이상 된 책에서 정의하는 위상공간이 현대의 정의와 어떻게 다른지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것도 온라인 자료가 아닌 꼭 실물 책을 보고 찾아오라고 하셨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직접 느껴보게.” 교수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은 무심한 듯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오래된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과거의 수학자들의 생각, 그들이 남긴 흔적들.

도서관은 익숙한 공간이었다. 수리과학과 건물로부터 멀지 않아 자주 찾았던 곳, 익숙하고 오래된 건물. 낡은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 때마다 나를 반기는 공기의 차가움이 있었다. 그 차가움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수학 말고도 세상 온갖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나에게 도서관의 책은 책등과 표지만 봐도 재밌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도서관 열람실은 혼자 공부하기 좋은 공간. 가까이 있는 수리과학과 건물 열람실을 두고 도서관 열람실까지 오는 이유이다.

이제 위상수학, 또는 해석학이나, 거리공간이나, 아무튼 그런 걸 담고 있는 오래된 원서를 찾아야 한다. 400번 어딘가를 뒤져보면 되겠지. 책장을 찾다가 나는 사서를 만났다. 다들 알바인줄 오해하는 사서 언니.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일 뿐이다. 검은 머리를 단정히 묶고,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이의 온기가 담겨 있다. 마치 오랜 시간을 지켜본 사람의 눈빛 같았다. “무엇을 찾고 있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부드러움이 묻어있었다.

“아니 그니까, …….” 이런, 나의 TMI가 쏟아져 나와버렸다. 오래된 원서를 찾아야 하는데, topology, metric space, analysis 같은 용어를 담고 있는 제목. 그런데 그게 엉뚱한 과제 때문이라는 것.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치 오래 기다려왔다는 듯이 따라오라고 했다. 아니, 나 혼자 찾을 수 있는데……. 하지만 내 TMI를 들어준 값을 지불해야 하므로, 나는 피할 수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책장을 지나갔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여기 있어요. 하지만 아마 더 흥미로운 걸 찾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미소는 짧고 선명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안내한 책장을 살펴보았다. 400번 어딘가가 아니었다. 책장 사이에 전에 본 적 없는 문 하나가 있었다. 좁지만 평범한 문이었다. 벽지와 색감이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나무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쩐지 이 순간을 위해 여기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열리자, 낯선 공간이 나를 맞았다. 천장이 높고, 책장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책장은 오래된 도서관처럼 삐걱거렸고, 먼지가 쌓여 있었다. 기묘하게도 그곳은 나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다. 책장 사이를 걸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혹은 시간이 모든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이름표가 붙어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내 이름이었다. 낯익고 익숙한, 그러나 언제 봤는지 알 수 없는 글씨체로 적힌 이름이었다. 어머니의 필체를 닮았지만,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책을 꺼내 들었을 때, 익숙한 냄새와 먼지가 얼굴을 스쳤다. 책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 미묘한 무게감이 나를 붙들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초원, 하늘, 그리고 따뜻한 손길. 그것은 내 기억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그 순간들. 나는 몽골의 초원을 뛰어다니던 어린아이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초원의 언덕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머니는 몽골어로 나지막하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살히 참드 시브네즈 바이나…” (바람이 네게 속삭이고 있어…) 그 언어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 담긴 따뜻함은 여전히 선명했다.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초원의 바람이 나를 감쌌다. 그 바람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바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아, 저 멀리까지 갈 거야. 하지만 네 곁에도 남을 거야.”

페이지의 글자들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글자만 희미해지더니, 이내 문장 전체가 사라져갔다. 당황해서 책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안 돼, 멈춰!”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책장은 멈추지 않았다. 글자는 점점 사라져 갔고, 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도서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책장이 미세하게 떨리고, 책들이 책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먼지가 일며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시간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책장은 점점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서가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기억을 붙잡고 싶겠죠. 하지만 이 도서관은 당신의 선택에 따라 존재하거나, 사라질 거예요.” 나는 책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이건 제 기억이에요. 어머니와의 마지막 연결고리일지도 몰라요.”

“그 기억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사서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기억이 당신을 무너뜨리게 한다면, 그건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때로는 잊는 것이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되기도 해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저에게 소중해요. 어머니와의 순간을 잃으면 저는 더 이상 저일 수 없을 것 같아요.”

도서관은 더욱 요동쳤다. 책장들이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먼지가 더 짙어졌다. 마치 나의 마음이 흔들릴수록 도서관도 무너져가는 듯했다. 혼란에 빠졌다. 기억을 붙잡고 싶은 욕망과, 도서관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싶은 바람 사이에서 갈등했다. 사서는 한 발짝 물러섰다.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기억을 붙잡고 싶다면 붙잡으세요. 하지만 당신의 지금 모습도 함께 사라질 거예요.”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 묘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남아 있는 몇 글자가 마지막으로 나를 붙잡고 있었다. “바람은 저 멀리까지 갈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초원의 바람처럼 부드럽게, 하지만 점점 희미해져 갔다. 책장이 갈라지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 기억은 이미 내 안에 있어. 내가 잃어버린 적이 없었던 거야. 어머니의 말씀처럼, 바람은 이미 내 안에 남아있어.”

책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도서관의 흔들림이 서서히 멈췄다. 책장이 다시 고요해졌고, 먼지가 내려앉았다. 책 속의 글자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책은 여전히 따뜻한 빛을 머금고 있는 듯 보였다. 마치 어머니의 미소처럼.

도서관을 나서는 길, 사서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기억은 없어지지 않아요. 당신 안에서, 바람처럼 계속해서 흐르고 있을 거예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미소가 대답을 대신했다.

현실로 돌아왔다. 도서관은 여전히 낡고 익숙한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책장은 조용했고, 사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음을 느꼈다. 어머니와의 기억은 더 이상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나의 일부라는 확신은 더욱 강하게 남았다. 초원의 바람처럼, 보이지 않아도 늘 내 곁에서.

누군가는 기억나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것도 우리의 일부다. 그것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다른 형태로 살아가는 무언가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바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불어오고, 그 바람은 우리 안에 머물면서 동시에 더 멀리 나아간다. 나는 그 빈틈 속에서 나 자신을 찾는다. 그리고 그 빈틈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로 가득 차 있다.

도서관을 나서며 나는 수학사 과제의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나는 책 속에서 위상공간의 정의가 아닌, 시간과 기억의 위상을 발견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교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찾아보라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January 13t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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